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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MP의 xxx HOLIC 앞 구절을 빌려왔습니다. 원작과 비슷하게 키세가 쿠로코를 돌보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전개하면서 설정이 조금씩 달라질 것 같아요. 상담자와 내담자 - 사건에 휘말린 사람 - 간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며 쿠로코가 상담자, 키세키들이 휘말리는 구조입니다. 이전에 타장르에서 썼었다가 사정이 있어 그만둔 걸 버리기 아까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니, 읽어 본 적이 있더라도 모른 척 해주세요ㅇ.<
날이 더울 땐 역시 괴담이지요. 총총.
00. 조우
세상에 신비한 일들은 많지만, 아무리 기상천외하고 기묘한 일들도.....사람이 없다면, 사람이 보지 않는다면, 사람이 관계되지 않는다면...
단지 현상. 단지 스쳐가는 일일 뿐.
사람, 사람, 사람.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생물.
"아, 지긋지긋해 죽겠네. 이 잡귀들은 왜 자꾸 날 따라다님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아주 어릴 적,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그것들이 내 눈에 보였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가방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빈 도시락통 소리를 '목소리'를 차단하는 방벽으로 삼아 오늘도 잡히지 않으리라 믿으며 달리는 것, 그것이 키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 이리와, 맛있는 아이야. 딱 한 입만, 팔 하나만, 아니 손가락 하나 만이라도.
- 머리카락도 괜찮으니까
- 눈알을 핥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만족하고 돌아갈 테니까
"미친 거 아님까?! 제 몸은 사탕처럼 할짝할짝 할 수 있는 게 아님다!?"
오늘따라 이 덩어리들이 끈질기게 굴 줄 알았으면, 좀 더 농구부에 있을 걸 그랬다. 이상하게도 농구를 하는 동안은 이 덩어리들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촬영이 잡혀 있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먼저 나왔건만 그런 보람도 없이 연기되었다는 말에, 새로 생긴 옷가게에 가지 말고 다시 농구하러 돌아갈 걸 그랬다. 후회해도 늦었지만.
"좀 떨어지십셔!!!! 다 큰 남고생이 뭐가 맛있어 보인다고 따라옴까!!!! 젠장, 대체 왜 날 혼자 두지 않냐고!"
덩어리들에 깔려서 땅을 쾅쾅 두드리는데,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이 질긴 것들이 순순히 떨어질 리 없는데, 나 혹시 죽었슴까?! 이미 동료가 되어버린 검까?! 연애도 못 해보고?! 한숨을 푹 내쉬며 그래, 저세상이란 거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라도 해야겠슴다,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땐,
"뭐야, 이 집.....진짜 괴상하게 생겼슴다............."
세련된 고층 건물들 사이에, 덩그러니 이질감을 풍기는 일본식 주택 하나가.
'남의 집에 막 들어가는 거, 취향은 아닌데....집이 특이해서 그런 거니까, 그런검다!'
낮은 나무 울타리를 슬쩍 밀어 넘기고 들어선 뜰 안은, 잘 꾸며진 정원 때문에 고풍스런 멋이 있었다. 징검다리처럼 박아놓은 돌을 하나 둘, 건너서 시원한 바람이 부는 마루에 섰을 무렵,
"어서오세요."
"엑, 아, 아니 난 불법 침입자가 아님다!"
"알고 있습니다. 자아, 손님은 이쪽."
유카타를 흐트러지게 걸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 집중했어도 글쎄... - 알 수 없는 흐릿한 존재감, 그다지 나이 차가 나 보이지 않지만 쓰고 있는 어투가 어쩐지 살짝 거리감을 주고. 물빛 머리는 여기저기 살짝 삐쳐 있다. 옷 매무새만 보면 방금까지 자고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리는 잠버릇?
남자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아니 조금 느릿한 발걸음으로 앞서 가는데도, 키세는 이상하게 그를 따라가기 조금 버거웠다. 마루 뒤쪽을 향해 한참 돌아가니 작지만 정갈한 다다미방이 보였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저기, 다짜고짜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이 없거든여.....불법 침입한 건 잘못했지만 말임다..."
"불법 침입이요?"
남자는 손등을 살짝 덮는 옷 소매를 끌어당겨 제 입매를 가리더니 쿡쿡 웃었다.
"불법 침입이 아니라, 이 집이 키세 군을 부른 거지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슴까?"
그는 이내 하얀 손가락을 주욱 뻗어 가슴께를 가리켰다. 아, 명찰.
"뭐, 일단 명찰이 없더라도 본인이 유명한 모델이라는 자각은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키세 군이 이 곳을 찾은 건 필연이니까요. 그러니 불법 침입인 걸 알면서도 들어오고 싶었던 겁니다."
"엣,"
"이 곳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가게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뭐든?"
"그렇지만, 공짜는 아니예요. 대가가 필요합니다."
"얼마면 되는데요? 나 돈은 많슴다! 아니, 더 달라고 하면 밤샘 촬영을 해서라도 줄테니까요!!"
"무슨 소원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키세 군의 소원은 분명, 그것들을 볼 수 없게 해달라는 거겠죠? 덤덤한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오싹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키세는 그저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 수 밖에 없었다.
"키세 군은 상당히, 아니 굉장히 맛있는 먹이예요."
"에?"
"그러니까 그 소원을 이루어주는 대가는 상당히 비싸게 받아야겠군요."
"....여...영혼이라던가?"
"......제 존재가 신기한 건 알겠지만, 서양의 악마같은 취급은 곤란합니다. 영혼을 받아서 쓸 데도 없고요."
".....미안함다."
"일하세요, 이 가게에서. 참, 제 이름은 쿠로코 테츠야라고 합니다. 계약하는 상대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니까요."
참고로 할인이나 계약 중단은 없어요. 빙긋 웃는 쿠로코는 어쩐지 잘못 걸렸나 싶을 만큼 살짝 소름돋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재미있을 거 같기도 하고, 이 지긋한 덩어리들에게 해방될 수 있다면.
01. 염소와 복숭아
"와, 날씨 진짜 미친듯이 덥슴다........쿠로코 군, 나 왔어요!"
며칠 전 얼떨결에 들어와버린 - 말로는 필연 때문이라던 - 집의 주인의 이름은 쿠로코 테츠야. 반강제로 체결한 계약으로 일하게 된 집이자 가게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곳. 평범한 사람 - 그러니까 소원이 없는 사람 - 에게는 이 가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함다. 어쩐지 주변 건물과 경관이 너무 안 어울린다 싶었슴다. 여기서 나는, 그러니까.....쿠로코 군의 유모를 맡고 있슴다.
"또또, 밥도 안 먹고 뒹굴뒹굴하고 있었죠! 에엑 바쉐가 오늘 먹은 것의 전부임까?! 밥을 먹어야 힘이 나는 거 모름까?!"
".....그치만 더운데요............"
"그럼 물놀이라도 하고 있던가요, 이게 무슨 청승이야....그 뭐냐, 가게를 감추는 능력으로 수영장이라던지 간이 풀장을 만들어 놀면 안 됨까?"
옷도 좀 잘 입고요, 남자라지만 그렇게 흐트러진 차림새는 보기 부끄럽슴다-! 하는 말에 입을 삐죽 내밀고 옷 매무새를 다듬는 쿠로코 군은 그야말로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나 다름없슴다. 요리도 청소도 내가 해줘야 하는 신세라고 할까.
"아......복숭아 냄새. 복숭아 잘라주세요."
어느새 마루에 늘어져버린 쿠로코의 타령에 키세가 복숭아를 조각내어 접시에 담아 건네주니, 쿠로코는 키세 어깨 너머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이상한 거, 또 달고 있네요. 이 정도는 안 보이나?"
손을 뻗어 툭툭 두드리곤,
"저 일 했으니, 먹여 주세요."
"저기여, 여태 집안일 하고 복숭아 자르는 것도 제가 했는데 쿠로코 군이 언제 일을 했다고 그럼까!"
"그래도 어깨 좀 가벼워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제가 일했다는 건 이런 쪽으로니까요, 자 이제 먹여 주세요. 손에 단물 묻으면 씻으러 가기 귀찮아요."
.......이런 신세입니다, 키세 료타.
"오늘부턴 귀가할 때 다른 길, 쓰세요."
"에?"
"염소 묶어놓은, 언덕배기 길로 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왜요?"
"좋지 않아요, 그 길."
늘어져있던 목소리는 어느샌가 똑부러진 목소리로, 쿠로코는 드물게 눈을 맞추며 말해왔다. 그 날 키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덩어리들이 보이지도, 따라오지도 않았다.
공포 영화를 보면, 나가면 죽을 텐데, 싶은데 꼭 굳이 혼자 나갔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던가. 키세는 그동안 영화를 보며 그들을 조롱했는데...........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키세는 며칠 전 쿠로코가 가지 말라던 그 길로 귀가하고 있다.............쿠로코의 가지 말라던 정갈한 목소리가 계속 그의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아니, 부활동 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늦어질 줄 몰랐슴다..........."
키세가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두 개가 있다. 쿠로코가 말했던 염소를 기르는 언덕배기 길과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는 길. 언덕배기 길이 조금 빨리 도착하기도 하고, 뭐라고 할까, 보통 주택가 쪽의 길이 밝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상하게 언덕배기 길이 환하달까. 건장한 남고생이라도 컴컴한 길은, 뭔가 영 찜찜하단 말임다.
라는 이유로, 언덕배기 길로 귀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흘린 땀으로 끈적하게 달라붙은 유니폼과 꽤나 풀이 죽어 볼썽사나워진 앞머리. 그렇지만 운동을 해서 넘쳐나는 에너지를 소비한 탓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런데, 쿠로코 군,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언덕배기가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열심히 걷다 보니, 염소가 살고 있는 언덕배기에 다다렀다. 늘 그랬듯이, 풀을 대충 쥐어 뜯어 울타리 너머로 집어 넣고 살살 흔들면, 염소가 쫄래쫄래 걸어온다.
"옳지 옳지, 어때 맛있슴까? 미안함다, 제가 이제 여긴 잘 안 올 거라서- 글쎄, 지금 돌보고 있는 악덕 업주가 앞으로 이 길은 가지 말라지 뭠까."
염소가 메에- 하고 울며 키세와 눈을 맞추던 그 순간, 그러니까 방금까진 평온했던 거리가,
뒤.바.뀌.었.다.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 소리도, 염소 울음소리도, 멀리서 들려오던 전철 소리도, 사람들의 대화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리려 주위를 휙휙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없었다.
.........아니, 지금까지 보던 것보다 훨씬 흉흉한 덩어리만 있었다.
"이런, 미친 제가 뭘 잘못했슴까!!!!!! 아!!!! 쿠로코 군 말을 들을 걸 그랬슴다!!!!!!"
농구화를 담은 주머니를 앞뒤로 흔들며 미친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그래도 길은 끝나지 않았다. 이쯤이면, 이쯤이면, 이만큼이면, 이만큼만 더가면, 우리 집인데, 우리 집일 건데.
집은 보이지 않고, 힘은 점점 떨어지고 있고, 덩어리는 미친 듯이 키세를 뒤쫓고.
평소처럼 나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슴다. 머리카락만 주면, 손톱만 먹고 돌아갈게- 따위의 목소리가 없어. 내 뒤의 덩어리는, 저 검은 물체는, 오직 날 먹으려고 달려드는 것, 악의가 가득한, 날 죽이려고 달려드는 저건. 뭐야, 뭔데. 왜 바뀐 거야. 그냥 멀더라도 말을 들을 걸. 쿠로콧치 도와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고,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마침내 이제 손을 조금만 뻗으면 덩어리가 날 잡아 삼킬거야, 잡힐 거야.............잡.혔.다.
"키세 군."
키세의 숨소리말곤 들리지 않던 고요한 거리가, 부서져 내렸다.
"말했잖아요,"
염소가 있는 언덕배기 길은 가지 말라고요. 쿠로코는 태연하게 그곳에 서있었다. 식은 땀을 줄줄 흘리는 키세의 어깨를 잡고서, 흐트러진 유카타 차림으로 바닐라 쉐이크를 쭉쭉 들이키면서.
"......죽는 줄 알았슴다."
"괜찮아요."
"쿠로콧치....."
"네에."
쿠로콧치는 긴 손가락을 뻗어, 조심스레 등을 껴안아주었습니다.
".......나 땀냄새 나."
"괜찮아요."
괜찮아요, 키세 군. 쿠로콧치의 평온한 목소리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쿠로코는 다 알고 있다는 듯, 가만히 등을 토닥였다. 어린아이처럼, 쿠로코의 유카타 소매 자락을 꾸욱 잡고, 쿠로코의 집으로 함께 걸었다. 달리는 도중에 벗겨진 건지, 어느 새 신발 한 짝은 사라지고 없는, 맨발 투성이로. 발바닥에 닿는 작은 돌들이 아팠다. 아팠다. 살아 있다. 살아 있구나, 나.
분명 그 덩어리를 피해 한참을 달렸는데, 시간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쿠로코가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나오는 그 거리는, 조용한 주택가.
".......왜 여기인 검까?"
쿠로코가 손을 뻗어 가리킨 그 방향을 바라보니, 거기엔 커다란 복숭아 나무가 있었다.
"그가,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그?"
"저 복숭아 나무는 벌써 몇 백 년을 살아 있거든요. 자,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세요."
흔들흔들, 느껴지는 목소리가 전하는 말은 평범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키세는 그저 납득할 뿐이었다.
"아까 그건, 뭠까?"
"원념의 사념체라고 할까, 이것저것 뒤섞여 있답니다. 키세 군은 어떻게 보이세요?"
"그냥 덩어리. 가끔은 까맣게 뭉친 거처럼 보임다."
".....그 정도로 보이는 거면 다행이네요."
쿠로콧치 눈에는 어떻게 보임까?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무언가 무서운 이야기를 들어버릴 거 같아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쿠로코는 목욕탕에 무언가의 꽃잎을 동동 띄우곤, 키세를 들여 보냈다. 한참 몸을 담그고 있으니, 이번엔 쿠로코가 잔에 사케를 담아 건네 주었다. 복숭아 향이 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키세는 욕조에 띄운 그 꽃잎도 복숭아 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씻고 나오자 여름용 얇은 홑이불을 깔아둔 쿠로코는 옆 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평소 같으면 혼자 자겠노라, 하겠지만 글쎄,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굴 수는 없었다.
"........쿠로콧치."
"네, 키세 군."
"만약에, 쿠로콧치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는 거였슴까?"
"끌려갔겠죠."
"어디에?"
"어디든."
쿠로코는 지옥이라던지 키세도 잘 아는 그런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키세는 오히려 그가 말하지 않는 그 미지의 장소가 더 두려웠다.
"다음엔, 정말 끝이예요."
"................"
"이번은, 운좋게, 제가 찾아냈지만. 다음에 제가 가지 못했을 때, 또 그 곳에 있다면, 그 땐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가지 마세요. 쿠로코는 고저없는 목소리로 통보했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됨까?"
"얼마든지요."
"왜 그 길로 가지 말라고 했슴까?"
"염소란 동물의 그 눈동자가, 변하는 모양 본 적 있습니까? 빛을 받으면 가늘게 찢어지는 동공 말이예요. 서양에선 일찍부터 악마의 상징으로 여겨졌지요."
".......그게 왜요?"
"염소 무리 속에, 악마가 하나 숨어 들기 좋다는 거예요.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처음은 아니었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키세 군을 노리는 무언가가, 염소 무리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그 찢어진 동공에 자신의 추악함을 감추고."
".......그럼,"
"요 며칠 끝나자마자 저희 집으로 오는 통에, 먹잇감을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전처럼 살살 꾀어 내려 부드럽게 굴 수는 없었겠지요."
제가 키세 군이 없다고 해서 굶어 죽는다던지 할 일도 없는데 부르는 이유죠, 라고 쿠로코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 말을 꺼냈지만, 아니, 쿠로콧치 그건 아님다. 쿠로콧치는 내가 없으면 굶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슴다. 은근슬쩍 묻어가려 하지 마요.
"옛날부터 복숭아 가지는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하지요. 수 백 년동안 자리를 지켜온 복숭아 나무가 있는 그 조용한 주택가 거리로 다니세요. 그가 지켜줄 거예요."
"왜..........."
"왜 주택가 거리가 더 깜깜한지 궁금한 거죠? 답은 간단해요. 아주 오래전부터 염소를 키우던 사람들은 염소 속에 이따금 악의를 감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예요. 그러니, 그것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일부러 밝게 해둔 거죠. 목동들이 별자리에 밝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별빛이 가득한 곳에서 악의를 띈 무언가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다보니까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염소 무리에 숨어든 두려운 존재의 이야기는 옅어지고 어두운 밤에는 조명을 밝게 하라는 이유 모를 원칙만 남은 겁니다."
"....확실히 주택가 쪽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던 것 같슴다. 오히려 언덕배기 길이 유난히 밝았네요...."
"말에는 힘이 있다고 그랬지요. 믿음이 약해졌다고 할지, 목동들에게 잊혀진 덕에 조명의 힘으로 속박되고 있던 존재를 구속하던 힘도 줄었습니다. 그 바람에 예전이라면 불가능했을 텐데, 키세 군을 노리던 것이 초조해서 자신의 힘을 다해 잡으려고 할 수 있었고요."
"그럼 그 어둑어둑한 주택가는....."
"가본 적 별로 없으시지요? 조명은 별로 없지만, 생각보다 깜깜하지도, 무섭지도 않아요. 상서로운 분위기가 서려있으니까요. 그곳의 주택들은 최소 몇 십 년 전, 최대 몇 백 년을 그 자리를 지킨 집이니까요. 그 집들에게 무언가 수호신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지요."
아 혹시, 너무 캄캄해 보이면 비타민 A 좀 섭취하세요. 야맹증이니까- 우스갯소리를 툭툭 던지는 쿠로코 때문에 키세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현대인들은 눈이 많이 어두워졌지요, 여러모로요."
마치 자신은 이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담담히 내뱉고는 이내 쿠로코는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자아, 이제 자세요. 이불을 툭툭 두드리는 쿠로코의 손길은 겪어본 적 없는 엄마의 손길 같아서 키세는 스르르 잠에 빠지고 말았다.
식이 조절 때문에 도시락을 챙기느라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버린 탓에,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쿠로코는 없었다. 어제는 도움을 받았으니까, 보답의 표시로 맛있는 반찬이라도 해줄까 하고 부엌에서 한참 있으니, 쿠로코가 부시시해진 머리로 나타났다.
"...잠깐만, 그거 제 교복이잖슴까......."
왼손에는 키세의 교복을 들고,
"아무래도 영 걱정이 되어서 말이죠, 달고 다니세요."
분홍색 탐스러운 복숭아 와펜이 덜렁 달려 있는.
"옷이 몇 벌이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잔뜩 만들어 봤으니까요. 가방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건 어떠세요?"
오른손에는 복숭아 와펜을 한가득 쥐고서.
"분홍색 복숭아가 뭠까!!!!!"
"그렇지만, 복숭아가 효과 짱이라고 했잖아요."
".......저 일단은 멋진 남자 모델 1위인데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요. 귀여운 복숭아인데 뭐 어떻습니까. 그리고 원래 미남은 귀여운 것도 잘 어울립니다."
불평하고 싶었지만, 쿠로코의 손에 감겨 있는 밴드들이,
삐뚤빼뚤 어색한 솜씨로 만들어낸 십여 개의 복숭아가 고마워서
키세는 말없이 그의 손에서 교복과 와펜 뭉치를 받아 들였다.
"자, 다녀오세요."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통을 열어본 후에야, 쿠로코의 선물을 또 발견했지만.
".........과일 진짜 못 깎슴다........복숭아가 맛있으니까 아무래도 괜찮지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