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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쉬흑 이민족 내쉬x공물 쿠로코 下

에딘MOON 2017. 7. 31. 03:20

말로 안 나왔다 뿐이지, 실은 꾸준히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던 탓이라 그럴까. 감정의 홍수는 보는 사람마저 기분좋게 만들었다. 연모하는 사람 이름이 무엇이야 비밀이예요. 놀리는 아낙들의 말에 쿠로코는 귓가를 붉게 물들이며 피했지만 넘어갈 리 없었다



그러지 말고 한 글자만, 아니면 초성이라두 좋아. 'ㅁ' 이요. 내 이름 어디에 'ㅁ' 이 있어 테츠야. 모른척 딴소리 하려다 딱 걸렸다. 부끄러운 쿠로코와는 달리 능글맞게 웃는, 쿠로코의 턱을 부드럽게 뒤로 젖혀 입맞춰오는 내쉬 때문에 아낙들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다가올 즈음 겨울순이 돋아나는 것처럼, 부드러움 한 조각 한 조각이 마음 속에서 피었다. 내쉬는 전보다 방어구를 잘 입기도 했고 덜 다치려 노력하기 때문인지 쿠로코가 치료해줄 일이 줄었다. 그리고 말을 돌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내쉬의 말은 이따금 천둥이 치나 싶을 정도의 투레질과 아주 큰 범이라고 해도 믿을 덩치였지만 제 주인에게만은 순한 양이었다. 도통 다른 말을 옆에서 달리게 하지 않던 녀석이지만 딱 한 마리 예외가 있었다. 얼마 전에서야 비로소 사람을



태워도 좋다는 판단을 받은 말이었다. 내쉬의 누이가 타던 말의 자손이라 했다. 이름을 물었더니 내쉬는 여기 말로 하면 샛별이려나, 웃었다. 본 이름은 샛별이 아니란 것이었지만 빙긋 웃는 모습은 쉬이 알려주지 않을 것만 같아 쿠로코는 언젠가 알려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그 말의 주인은 쿠로코가 되었다. 애초에 내쉬의 말 곁에 같이 달릴 수 있는 게 그 하나였고. 군마로 쓸 수는 없었지만 이따금 말을 타고 산책하기엔 제격이었다. 쿠로코가 마을에 정착한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이제



이곳의 언어도 제법 능숙해졌다. 간간히 말을 타고 내쉬와 조금 멀리 나가 저잣거리에서 간식을 사먹기도 하고 책을 사오기도 했다. 그날도 그랬다. 남쪽에서만 난다는 과일로 만든 간식을 먹으러 나선 길이었다. 조금은 먼 길에 중간중간 쉬어 가기도 하고



그럴 계획으로 출발했었다. 모래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을 지나며 사람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다소 악명 높기는 했으나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는 곳은 아니였다. 때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상태가 심히 걱정되었던 지라 쿠로코는 내쉬를 불러 세웠다. 쿠로코가



보기엔 칼 한 자루 휘두를 힘도 없을 만큼 탈진한 것 같았지만 만의 하나, 감추고 있는 발톱을 드러낼지도 모르니 내쉬가 직접 나서겠다고 (전에) 얘기한 바 있었기 때문에. 내쉬는 쿠로코를 말에 태운 채 본인만 휙 내려서더니 쓰러진 사람에게로 향했다.



정말로 탈진한 모양이었다. 가져온 물을 좀 주고 응급 처치할 요량으로 남자를 뒤집고 터번 (비슷하게 만든 것) 을 벗겨 냈을 때 쿠로코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 나왔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내쉬 상처들이 심했을 때도 덤덤했다- 놀랄



이유가 없었는데. 당황한 기색으로 쿠로코 쪽을 바라보자 어느새 내려온 건지 울며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놀란 와중에도 손은 착실히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제법 거리가 있던 쿠로코가 도착할 즈음은 남자도 움찔거렸다. 쿠로코의 손은 정말로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형 형, 하며 얼굴을 더듬는 쿠로코를 뒤에서 껴안아 진정시키고 쿠로코 말 위에 남자를 실었다. 쿠로코가 내쉬 등에 얼굴을 파묻고 얼마나 울던지 다시 마을에 도착했을 땐 등이 흠뻑 젖어 있었다. 치료하기 수월한 상황에서 남자는



각별한 대우 끝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자마자 다시 떠나려는 남자를 만류할 때 연락을 받은 쿠로코가 급히 나타났다. 땅 위에 떨어져 박살난 열매들이 그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남자는 쿠로코의 형이라고 했다. 내쉬는 이따금 함께 새벽을



맞이하며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던 쿠로코를 알았기에, 그가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는지도 잘 알았다. 아버지가 편찮다 했다. 사랑하는 막내 아들을 빼앗기다시피 보내고 심지어 도적단을 만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에 몇 번이고 수소문했다. 고국에 돌아오지도



이국 어딘가에 물결과 같은 머리칼을 지닌 이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가 쿠로코 가문의 막내는 죽은 모양이라 수근대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기울어지는 나쁜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관직을 그만두고 시름시름 앓는 아버지 모습에 형들은



가만있을 수 없었다. 작은 형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직접 다녀오겠다고 나섰고 넓은 대륙에 걸맞게 다채로운 기후 속에 조금씩 지쳐가다 쓰러졌던 듯 했다. 아무도 테츠야 네가 돌아왔다 한들 뭐라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하기사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고



막내를 보낸 대가로 더더욱 강한 힘을 가진 집안에서 한참을 수소문했는데 찾지 못했으니 공녀처럼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우스웠다. 아비는 마음의 병을 얻은 거라 막내 아들이 무사한 것만 안다면 툭툭 털어내고 일어날 것이다. 함께 돌아가자는 형에게



쿠로코는 선뜻 그러겠노라 답하지 않았다. 제가 직접 가서 아버지를 보면 단숨에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내쉬하고 다시 만날 수 있을까....내쉬는 책임질 사람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자신을 사랑하니까 모든 걸 두고 같이 가달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사랑과 가족 중 무얼 택하겠냐는 얘기를 어릴적 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처럼 바로 결정지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고. 아버지라면 내가 건강히 있다는 서신으로도 믿고



기다려줄텐데. 고민하던 쿠로코를 이끈 건 내쉬였다. 돌아가, 테츠야. 그렇게 쉽게 결정지을 문제가 아닙니다. 테츠야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 반드시 만나러 갈게. .... 사실은 같이 가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나한테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 일 끝내고 만나러 갈게. ....꼭....꼭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물론. 예정보다 이른 선택의 시간이었다. 쿠로코는 형과 떠나기 전 조금 자란 머리칼을 잘라내서 촘촘히 엮었다.



이건 부적입니다. 항상 갖고 다니세요. ....고마워. 테츠야, 다시 만나. 머리카락으로 만든 검 술을 몇 개 쥐어주고 허무할 정도로 담담히 이별을 맞았다. 쿠로코는 마음 속으론 수백 번 뒤도는 상상을 하며 한 번도 뒤를 보지 않았고 내쉬는 한 번도



쿠로코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제 쿠로코가 내쉬와 함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 그가 타고 있는 말 뿐이었다. 품 속에 조심히 갈무리한 몇 장신구와. 몇 년 만에 돌아간 고국은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이 아주 멀쩡히, 제법



행복히 살고 있었다는 걸 알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버지와 둘째 형의 복직과 동시에 쿠로코가의 막내가 돌아왔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쿠로코는 언제쯤 자신을 불러 당시 상황과 여태까지의 행보를 물을까 안절부절했다.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없었다. 충신 가문에게 저지른 일이 미안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실은 황실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국의 황제에게는 무수히 많은 곳에서 보내진 여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자식의 수도 상당했다. 일부는 공물로 보내진 것들로 사치 향락을 일삼고 일부는 필부로 살아갔고 일부는 어떻게든 나라를 바로 세워보려 간언하다 쫓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어 그가 지금의 황실에 반기를 세웠다는 것.



우습게도 황제가 가장 총애했던 여인의 태를 빌려 나온 자라 했다. 제일 사랑한 여인의 아들에게 증오받는 아버지라. 따르는 이도 많고 능력도 있어서 향후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조정은 거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쿠로코는 제 지난 날이 어땠는지 추궁받지



않는 것은 좋았으나 내쉬가 괜찮을지 걱정되었다. 지금의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그 사람은 차별받고 박해받던 내쉬와 마을 사람들에게 상냥했으면 좋겠다. 그저 그렇게 빌 뿐이었다. 볕이 좋은 날이면 쿠로코는 소중히 품어 온 장신구들을 내어 놓았다.



금사로 장식된 노리개며 가락지 따위였다. 쿠로코를 보낸 이후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재산에 빗대면 대단치 않을 수도 있었지만 쿠로코에겐 그 장신구와 말 한 필이 억금보다도 귀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의 증표였으므로.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던 이는 쉬이



잡히지 않았다. 아직까지 전면전이 없어서였다. 치고 빠지는데 능숙한 데다 소규모로 여기저기 피해를 입히는 탓에 공물이나 지원을 요구할 타이밍을 번번이 놓쳐서 고국은 평화로웠다. 일 년 남짓 계속되던 싸움은 그동안 나타나지 않던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서



방심하던 황제의 목을 친 반란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반란군의 수장은 오랫동안 쫓겨난 이들과 결탁해서 계획대로 황군 대부분을 꾀어 냈다. 다만 꽤나 접전이라 크게 다친 것으로 알려진 뒤 소식이 없어 황제의 자리가 비어있다 했다. 그래도 사라지기 전



그가 얘기해두었던 대로 더이상 무리한 공물 요구는 없을 것이며 또한 원치 않는 사람을 보내지 말되 원한다면 자유로이 연애할 수 있도록 문화 교류를 늘리고 길을 정비하겠다는 서신이 사람들의 불안감을 덜었다. 쿠로코의 이웃집 여식도 어릴 적 사절단을 따라



갔다 들린 마을에서 만났던 남자와 결혼하겠다며 떠났고 이민족 사람과 만난다고 해서 전처럼 극심한 반대에 휘말리지 않았다. 내쉬의 소식은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국경 부근에 있던 형이 마지막 접전지 근방에서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을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테츠야 네가 봐야 할 것 같다, 떨리는 필체에 쿠로코는 지체하지 않고 말을 몰았다. 지금껏 봤던 상처들도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이번엔 정도가 달랐다. 위중한 상태니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하라는 형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밤낮이 바뀌는지도, 시간이 흐르는



지도 모르고 간간히 형이 보내온 요깃거리로 겨우겨우 버텼다. 바보같이 뭐가 그리 급해서 그 위험한 곳에서 앞장을 섰어요. 하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반한 사람이 그런 사람인 것을. 그저 눈앞의 이 사람이 정말로 빨리 가버리지만 않게 해달라고 빌 뿐.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서 내쉬가 숨을 쉬고 있는지 살피기를 몇 번, 처음만큼 열이 끓거나 숨소리가 미약하진 않았다. 뭐라도 입에 흘려줘야 빨리 회복하겠지 싶어 죽을 끓여 오는 찰나의 사이 내쉬는 눈을 떴다. 죽그릇을 들고 오던



쿠로코의 손에서 챙그랑 소리와 함께 숟가락이 떨어졌고 뭐라 말할지 모르고 어버버거리는 쿠로코에게 사후세계에서 당신같은 선녀가 있단 말은 못 들었는데. 내쉬가 너스레를 떨었다. 사후세계라는 말이 장난처럼 나오느냐고, 나는 당신을 더이상 만나지 못할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느냐는 쿠로코의 울음섞인 외침과 내쉬의 가슴팍에 떨어지는 주먹 세례가 시렸다. 쿠로코, 나 환자야. 그러다 죽겠어.... ㅁ, 미안합니다 내쉬군 퓽ㅅ퓨 아닌게 아니라 쿠로코의 얼굴은 한참을 누워 굶었던 내쉬만큼이나 나빴다.



고비는 일찍 넘겼지만 꽤 누워 있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내쉬가 할 수 있는 건 누운 채 팔을 뻗어 쿠로코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 뿐이었다. 배고플테니 일단 허기라도 채우자는 쿠로코의 말은 뒷전이요, 그의 입술을 집어 삼키는 짐승이 먼저였다.



서신의 글씨가 마르기나 했었을까. 작은 형은 부리나케 달려 왔다. 말의 입가에 거품이 부글부글 이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극진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난감해하는 내쉬와 영문을 모르는 쿠로코, 금세 땅에 박을 것같이 인사하는 형.



왕에게도 이렇게 인사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쿠로코의 머리가 상황을 해석하는 것보다 작은 형의 말이 앞섰다. 한 번 목숨을 빚지고 수천 수만의 백성들의 목숨을 빚졌습니다, 폐하. ㅍ.ㅍ....? 폐하? 아니, 아니...그런 인사는.....하....



아직 결정난 일도 아니니 그저 필부일 뿐입니다. 지존에게 갖춰야 할 예는 넣어두십시오. 자물쇠가 달칵 열리듯, 수수께끼도 풀렸다. 베일에 싸여 있던 반란군의 수장이 내쉬였구나. 함께 살던 시절, 주기적으로 나가서 다치고 오던 일이며 저를 맞이하러



오겠노라 약속해놓고 그 어려운 싸움을 앞장선 일이며. 모두 그가 수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 작은 형을 이기진 못했으나 내쉬는 쿠로코만은 그저 평범한 사내로 자신을 대해달라고 했다. 아직 실감이 안 나기도 했고, 갑자기 연인이 황제가



될 거란 소리를 듣고 태연할 리도 없었다. 작은 형이 피리로 불러낸 매의 발톱에 서신을 묶어 날리고선 둘을 안락한 집으로 안내했다. 국경의 끝자락,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 있었다. 어머님이 널 낳을 때 이곳의 푸른 물을 그리 보셨단다.



그리움과 애틋함의 사이에 잠긴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난히 사랑받는 아들이었던만큼 주기적으로 형들이 집을 손수 관리하고 있었다 했다. 어머님 덕분에 목숨을 빚졌군. 덤덤히 말하는 내쉬에게 그저 피차 은혜를 갚은 것입니다, 형 역시 담담히 답했다.



어쩐지 국경 부근에 있더라. 쿠로코는 툴툴댔지만 기묘한 우연에 감사했다. 쿠로코의 어머니가 그랬듯 마당에 자라난 풀을 뜯어 요리를 하고 호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일국의 황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내쉬는 쿠로코에게 입맞춰달라, 연모한다 말해라



타령이었다. 이따금 내쉬는 서신을 보내며 제국의 기틀을 닦는데 보탬을 주는 것 같았다. 이대로 살면 좋겠다, 싶었지만 내쉬는 황제가 될 사내였다. 내쉬의 몸이 다치기 이전보다도 건강해졌을 때 내쉬는 이제 다녀오겠다고 했다. 황제인 그가 어떻게 다시



올지는 몰랐다. 내쉬의 검에는 아직도 제가 주었던 머리칼로 만든 술이 달려 있었다. 입고 있던 갑옷이며 검날이 상한 정도에 비해 퍽 멀쩡했으나, 쿠로코는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그를 해칠 인물이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부적의 효험이 떨어진



것 같아서. 머리가 꽤 길어서 이번에는 더욱 크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겠다. 기쁜 마음으로 서걱 잘라낸 머리칼로 새로운 술을 만들어 건넸다. 내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먹먹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서늘히 드러난 뒷목에 입을 맞췄다. 불에 데인 듯



화끈함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천천히, 한참을 지분거리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사실 목덜미에 내쉬가 제 이름을 새겨둔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으로 가락지를 만들어 손에 끼워주겠노라, 한 마디를 남겨놓고 내쉬는 떠났다.



제국의 황제가 마침내 빈 자리를 채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쫓겨났던 이들과 함께 기틀을 닦고 황후 자리는 안정적으로 나라가 돌아갈 즈음 채운다고도 했다. 자신은 그저 내쉬 곁에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니 황후가 아니어도 괜찮지만 한편으로는



후사를 보기 위해서든 형식적으로 맞이할 황후 자리에 오를 사람과 내쉬를 공유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애정없는 지위만 높은 자리에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것도 몹쓸 짓이었다. 남자가 황후에 오른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몇 대 전의 남자가



여성인 척 하며 황후 자리에 있었고 제 짝을 잘 살피어 태평성대를 이뤘다는 얘기를 들어보면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외려 자유연애를 허락하고 있는 지금의 실정에서는 반길지도 몰랐다. 그러나 황후가 되는 길의 끝에는 가족과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에겐 한 번 죽었다 살아온 듯 느껴지는 쿠로코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에 쿠로코는 선뜻 제국에 가겠다고 입을 열 수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괜찮은 듯 괜찮지 않은 쿠로코를, 가족들이 불러냈다. 스윽 내밀어지는 함 속에는 갖은 장신구며 의복



따위가 가득했다. 이제 가거라, 애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따뜻하게 쿠로코를 감쌌다. 이제 가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요.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하단다. 그렇다면 장신구는 두고 가겠습니다. 형들이 혼례를 치르거든.... 네 목숨 값이니 네가 가져가



오랑캐와 사랑을 나눈다니 집안 망신이라며 이민족과의 결혼을 반대하거나, 첩으로라도 들어가 가문의 힘을 키워보라거나 하던 게 얼마 전이었다. 세상은 좋은 의미로 변하고 있었고 형들과 아버지는 쿠로코가 더이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뻤다. 사랑하는 막내를 머나먼 곳으로 보내는 심정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겠는가. 될 수 있다면 품 속에 넣고 보고 지고, 늘 곁에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따금 밤에 서성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데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쉬가 데리러 오길



모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기다리게만 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먼저 날려보내자는 심산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구박받을까 혼수도 제대로 들려서. 눈처럼 하얀 혼례복도 저 좋아하는 약과며 간식들도 챙기고. 아버지는 마중가지 않겠다 했다.



눈이 소복소복 오던 날 쿠로코는 아비가 있는 쪽을 향해 큰 절을 올리고 형들이 붙여준 호위와 함께 집을 나섰다. 국경 부근에 다다렀을 때, 눈이 어찌나 내렸던지 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서면 자신은 다시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아서



국경 부근의 어머니가 머물던 집에 있기로 했다. 사랑 때문에 가족을 두고 떠났다는 미안함과 고마움에 가져온 패물들을 팔아 호화롭게 있을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고. 가족에게는 이따금 서신을 보냈다. 봄이 왔을 때 쿠로코는 황제가 황후를 맞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흰 눈처럼 살결이 희고 입술이 동백처럼 붉은 미인이라 했다. 제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않아도 되었으니 이따금 가족들을 보고 싶다며 찾아와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약간은 섭섭했다. 제게 귀띔은 하지, 그래도. 집을 정리하고 떠날 채비를 하는



때 혼례복 차림의 내쉬가 벌컥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변복하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며 궁을 비우는 경우는 없었다. 더욱이 눈에 띄는 혼례복으론 변장의 의미도 없지 않은가. 쿠로코가 굳어있는 사이



내쉬가 새싹이 사이사이 돋은 돌바닥을 거침없이 밟고 오더니 품 속에서 꽃신을 꺼냈다. 화려하진 않았다. 황후 자리에 서는 것도 아니니 상관은 없겠지만. 쿠로코 머리색과 꼭 같은 하늘색 작은 꽃들이 잔뜩이었다. 아직은 날이 추운데, 하고 내쉬가 옷을



어깨 위로 슬쩍 둘러주었다. 꽃신은 아직 따뜻했다. 황궁을 비우고 와도 괜찮습니까? 황궁은 비운 적 없는 걸. 황후가 되고 싶었어? 그럴 리 없잖아요. 저는 너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내쉬는 머뭇거리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 자리에 앉으니 예법이니 뭐니 성가신 게 많더라고. ... 알다시피 난 버림받은 왕자 중 하나였으니까 이렇게 재미없는 줄 몰랐지. 황후 자리도 그럴 거 아냐. 확실히 예전엔 동침 횟수나 자세도 관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뒀어. 네?



나는 그냥 테츠야와 살고 싶었던 것 뿐이라서. 나보다 더 적격인 사람이 있길래 양위하고 왔어. 황제 자리를 그렇게 쉽게요? 다쳐서 여기 있던 동안 대리하던 사람이라 나보다 더 얼굴이 알려져 있어서 별 일은 없었는데. 없었는데? 빈털터리야, 나.



세상에서 제일 좋은 가락지를 해주겠다 호언장담했는데 못 지킬 것 같아. 슬며시 손에 끼워진 것은 은빛의 가락지였다. 얼마나 손에 꽉 쥐고 있었는지 따뜻했다. 하얀 금이 발견되었다길래 그걸로 가락지 한 쌍 만들어달라 했지. 백금이라는 거군요.



아주 흔한 건 아니지만 아주 귀한 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서 욕심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 나랑 혼인해줘, 테츠야. 황후가 되어달라는 청을 들었어도 이보다 기뻤을까. 내쉬 손에서 빛나는 가락지를 보고 쿠로코는 웃었다.



바보군요, 너는. 엉? 내쉬군이 주는 거라면 뭐든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아니겠습니까. ㅍvㅍ* 테츠야.... 어쩔 수 없네요. 아무것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남자니 제가 거두어야지요. 집으로 돌아가기는 그렇고 형들도 번거롭지 않게 이 집에서 쭈욱



살자는 말에 내쉬도 가족들도 만족했음은 당연했다. 내쉬군, 저 꽃 보입니까? 꽃신에 있던 꽃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물망초라고 합니다. 응?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꽃이죠. 아 내쉬 군이 혹시라도 권력이 탐난다며 돌아가더라도 저를 잊지 못하게 할겁니다



테츠야 없는 미래가 무슨 소용이람. 그래서 그거랑 텃밭 잡초 뽑는 게 무슨 상관이야...? 내쉬 군이랑 제가 열심히 키워서 해먹은 음식 맛이 그리워서라도 다시 오게 하려고요ㅍ.ㅍ+ 글쎄 떠날 거란 가정을 아예 하지 말라니까! ...맛있긴 하지만.



애초에 이미 처음 만났던 날 사로잡혔으니 그럴 걱정인들 하지 마라는 내쉬의 볼멘 소리에 쿠로코의 웃음소리만 커져갔다. 국경 부근의 아담한 집에는, 행복한 두 사람이 살고 있다. 이래저래 많은 걸 초월한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