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포/샘플

녹흑 트윈지 샘플3

에딘MOON 2018. 3. 26. 15:07

02. 미도리마의 고백




 

미도리마와 쿠로코는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취미를 놓고 본다면 제법 독서 취향이 맞는 좋은 친구로 남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성격의 차이가 자꾸만 둘을 갈라놓았기 때문이었다.


……성격의 차이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쿠로코가 보기에는 미도리마는 너무 지나치게 진중한 감이 없지 않았다. 신중하고 또 계획적인 사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오하아사를 시청하고 계획한 일대로 움직인다. 쿠로코도 나름 계획적으로 생활한다지만, 적당히 유동적이라 숨이 턱턱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쿠로코는 한 때 미도리마를 볼 때마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미도리마의, 그의 치밀한 행동 계획과 그걸 착실히 지켜나가는 그의 성실함에.



 

아마, 미도리마 군도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쿠로코는 다들 존재를 잊고 있던, 그들 앞에 놓인 따뜻한 정종을 홀짝홀짝 들이키며 말했다. 곧 결혼할 사람을 앞에 두고, 실은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은 건가. 키세는 난감한 기색으로 힐끔 미도리마 쪽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외려……,



 

이 술은 마시다 보면 한 순간에 취하기 십상이라는 거야.”


 

쿠로코가 언제부턴가 홀짝이던 술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뭔가 방금 커플 사이에 오가는 부담스러운 눈빛을 본 것 같았는데. 키세는 애써 무시하며 생각했다. 쿠로코의 말은 이해할 수 있다. 기적의 세대 중에서 가장 성실했던 건 미도리마였다. 다른 이들과 능력이 크게 차이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 정도로 노력할 수 있을까 궁금한 적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말을 쿠로콧치가 하나? 키세가 보기에는 미도리마나 쿠로코나 똑 닮은 둘이 만난 셈이었는데.



키세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도 쿠로코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학교에서 말이죠,” 쿠로코 나름의 해명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둘이 같은 대학교였지. 거기서 또 우리가 모르는 무슨 사건이 있었나?”


벚꽃이 너무 예쁘게 만개한 겁니다. 햇살도 포근하고 살랑이는 바람까지 완벽한 하루였죠.”


그런데?”


그래서 교정을 거닐며 강의실로 들어가려다 그대로 유턴해서 놀러 갔습니다.”


…….”

 



, 그런 의미에서였구나. 모두들 침묵으로 납득했다. 쿠로코는 목표한 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름대로 계획적인 인간이지만 종종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있었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나서는 대로 움직여 버리는 것이다. 재버워크와 싸우기 전 날처럼 문제 상황에 끼어들었다 봉변을 당한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덩치가 좋은 것도, 아카시처럼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는 것도 아니면서 어쩜 그렇게 간이 부었는지.




순간적인 충동에 휩싸이지 않는 미도리마가 보기에는 불만스러울 법도 했다. 고등학교 때도 카가미 뒤에서 엎드려 잤다거나, 수업을 종종 빠졌다고도 했지. 여기 있는 모두는 설령 쿠로코가 그림자가 옅지 않았어도 똑같이 했으리라 의심치 않았다.



미도리마가 뭐라고 대꾸하려나. 제발 위험한 일에는 나서지 말아달라고 하려나. 궁금함에 슬며시 쳐다보았을 때, 미도리마의 대답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래서 그 다음 해부터는 같이 놀러갔다는 것이야.”


직접 골랐을 수강 과목 시간에 제 발로 나가 놀다니 믿을 수 없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쿠로코만은 당연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렇죠. 사실 처음엔 숨 막힐 정도로 계획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미 전적이 있었는걸요.”


.” 아카시가 탄식하듯 뱉은 소리에 키세도 번뜩 이야기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미도리맛치가 쿠로콧치 찾아갔다는 이야기 하던 중이었죠.”



 

쿠로코는 퇴부서를 낸 후 부활동은 물론, 학교도 가지 않아 널널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이처럼 한가했던 순간은 또 오지 않을 것처럼. 한 때는 어쩌면 변하고 있는 친구들이 돌아봐줄 지도 모른단 생각에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겨내지 못하고 퇴부서를 냈더랬다. 카가미를 만나기 전 겨울 방학은 유독 쿠로코에게 혹독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쿠로코를 지탱하던 건, 새로운 빛과의 승부로 오랜 친구들에게 함께 하는 농구의 기쁨을 상기시키겠다는 다짐과 무미건조할 정도로 반복하는 일상. 그러니까 장르를 가리지 않은 광범위한 독서와 다른 생각이 쉬이 들지 않게 몰아붙인 체력 단련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일상의 불청객으로, 미도리마가 찾아왔던 그 날은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기억이 온통 하얀색으로 가득 찰 정도로.





테츠야, 오늘은 눈이 많이 내릴 모양이구나. 추울 테니 목도리와 모자, 장갑을 꼭 가지고 가려무나.”


할머니의 푸근한 미소에 얼굴이 반도 안 남게 가려져 현관문을 나섰던 날이었다. 새벽부터 조금씩 내리던 눈은 아침이 되자 점차 굵어지기까지 해서, 금세라도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을 것만 같았다. 익숙하게 우편함 안을 살피고 울타리를 나선 쿠로코 눈앞에 서있었던 건 미도리마였다.



 

…….”


…….”


미도리마 군, 오랜만입니다.”


아아, 오랜만이라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과연 뭐라고 할까. 너답지 않게 무슨 짓이냐고 할까, 어쩌면 퇴부서를 냈다는 것도 아직 모르고 있을까.



설마. 모른 척 할 순 있지만 모를 린 없겠죠. 자신과 사이는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퇴부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하진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부활동 중에도 늘 한 번씩 쿠로코가 물을 챙겼는지 스트레칭은 꼼꼼히 했는지 확인하는 편이었으니까. 미도리마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낼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나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바라보는 쿠로코의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미도리마는 덤덤히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미도리마가 그렇다고 하니 쿠로코는 정말로 미도리마가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쿠로코라는 문패를 보고 멈췄나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미도리마가 등굣길에 이 근처를 지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도 어서 학교로 가야 할 미도리마가 아직까지 제 뒤를 따라오는 상황이 우연일 리 없었다.



 

할 이야기가 뭔가요, 미도리마 군.”


딱히.”


할 말이 없다면 학교에 가야하는 시간 아닌가요.”


그러는 넌,” 미도리마는 제 목소리가 비난조로 들리지 않길 바라며 대꾸했다.


쿠로코 테츠야는 왜 등교하고 있지 않냐는 거야.”


유리알 너머로 곧고 맑은 눈이 쿠로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아, 그렇지. 이런 사람이었죠.


언젠가 누군가는 한 번 정도 집에 찾아올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애써 괜찮은 척 하거나 이도 여의치 않다면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고 돌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 쿠로코의 집에 찾아온 건 아오미네나 키세였지, 미도리마가 아니었다.




 

미도리마가 우연을 가장해서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든 쿠로코를 찾아온 건 쿠로코가 예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알던 미도리마는 굳이 자신을 찾아와 설득할 사람이 아니다. 쿠로코의 상상 속 키세처럼 설득하다 끝내 도망친 거냐고 화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에게 실망했을 거란 확신은 있었다. 다만 일일이 그런 마음을 자신에게 털어놓을 사이가 아니었으니 이건 뜻밖의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쿠로코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진행해본 대처 시뮬레이션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었다는 뜻이다.


쿠로코의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던 듯, 미도리마는 꽤 긴 시간의 침묵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대신 묵묵히 쿠로코의 옆자리를 지켰다. 아침부터 굵어지던 눈발은 이제 눈이라고 부르기 무서울 정도라, 쿠로코는 기약 없이 밖에서 방황하길 그만두기로 했다.



 

미도리마 군, 여전히 단팥죽 좋아하나요?”


오랜 시간이 걸려 나온 첫 말은 그게 전부였다.






 

쿠로코의 집에서 적당히 산책할 만 한 거리의 노포는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익숙한 듯 손수건과 수저를 챙기는 쿠로코와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가게의 내부를, 미도리마는 신기한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쿠로코가 단팥죽 두 그릇을 시키고 돌아오며 쭉 무거웠던 입을 열었다.

 



할머님께서 좋아하시는 단골 가게입니다. 겨울이면 한 번씩 찾아와 단팥죽을 먹었어요. 너무 달지도, 너무 심심하지도 않아 좋아합니다.”


……그렇군.”


솔직히 놀랐습니다. 미도리마 군이 찾아올 거란 생각은 못 했거든요.”


그런가.”


……이상하네요. 평소라면 찾아온 게 아니란 거다!’ 부인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게 맞으니까 그렇다는 것이야.”

 



순순히 대답하는 모습에 쿠로코가 되려 놀랐다. 아무래도 그동안 생각해온 미도리마의 이미지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미도리마 군이 찾아올 정도로 각별한 사이라고 느끼지는 못했는데요.”


우리 친한 사이 아니지 않나?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에도 미도리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쿠로코는 몰랐겠지만, 매사 계획적인 삶을 살다 충동적으로 학교를 빠지면서까지 쿠로코를 찾아온 시점에서 미도리마에게 더 충격적인 건 있을 수 없었다.


쿠로코도 미도리마의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던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황스럽습니다, 이 상황이.”


?”


퇴부서를 내기 전에도 한참 고민했고, 낸 후에도 상당한 시간을 생각했어요. 만약, 만약 날 찾으러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키세나……, 어쩌면, 아오미네 군이. 그래서 어떻게 행동할지 수십 번, 수백 번 상상했어요.”


…….”


아카시나 무라사키바라, 나는 찾아올 가능성이 0%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 판단에는 나름 이유가 있겠지. 미도리마는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견디며 쿠로코의 말을 기다렸다.




 

……조금 기쁘기도 하고요. 미도리마 군이 찾아오는 일은 생각해보지 않아서, 솔직히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자제하는 게 풀려 버릴까봐 두렵기도 합니다.”


뭘 자제하냐는 거야.”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절망감과 무력감, 그리고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심정. 자꾸 그런 어둠이 절 잠식하려 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을요.”


고등학교 진학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섣부른 위로를 하기보단 다른 질문을 해왔다. 그것은 잠시 울적해지려던 쿠로코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세이린 고등학교에 가보려 합니다.”


……?”


새로운 빛을 만나 여러분에게 패배를 안겨 주고 싶습니다. 농구는 결코 한 사람의 재능만으로 결정지을 수 없다는 걸, ……나의 농구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해주겠습니다.”


.”


방금 혀 찼죠!”




제가 11이라면 누구도 이길 수 없지만, 함께라면 혼자 싸우는 너희들이 무섭지 않습니다. 툴툴대는 쿠로코를 보고 픽 웃은 미도리마는 덧붙였다.

 





혀를 찬 게 아니야. 널 못 믿는 게 아니란 것이다. 다만, 내게도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뿐이란 것이다.”


……왜요?”


내가 널 좋아하니까.”



단팥죽 맛이 좋은 걸. 꼭 그런 말을 하는 어조였다. 그 다음은 귀까지 빨개진 채로 단팥죽을 허겁지겁 먹고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돌아온, 흐릿한 기억만 남아 있다.






아마 이제 재판할 리 없지 않을까 싶은 우리의 트윈지.....

별 말이 없으니 다들 잘 읽고 계신 거겠지......

샘플 3까지 해서 총 39페이지 중 18페이지 분량을 공개했습니다.

본 책에서는 조금 수정된 부분도 있고 그렇습니다....